작년의 woo 행사에서 희연님이 하셨던 명언이 있다.
“디자이너는 모두 이미 풀스택이예요!”
흔히 웹의 프론트와 백엔드, 클라이언트 개발까지 모두 넓게 커버할 수 있는 개발자를 풀스택 개발자(Full-stack Developer)라고 부르며, 깊게 한 분야를 파기보다 넓은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개발 인력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사실, 통상적으로 디자이너의 업무 영역이 훨씬 넓다. 개발은 디지털 프로덕트 개발 내에서 풀스택이지만, 디자인 직군의 경우 프로덕트 제작 업무 내에서 타 직군과 공유하는 회색 영역 뿐만 아니라 모든 부수적인 제작물들의 비주얼 디자인까지 요구받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각 상당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료들이나 평가 주체도 크게 가치있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이 업무를 하는 나 스스로조차 어쩔 수 없는 잡무들로 취급해왔던 감이 있다. 그러나 한 분야의 개발을 잘 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얻는 경험치가 필요하고 iOS 개발자가 웹 프론트엔드나 백엔드를 잘 할 수 없듯,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정말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본인의 역량과 관계 없이 풀스택 이상의 업무를 소화하고 있다. 100의 노력을 들여 10만큼의 결과물을 만들어가며.
대표님에게 당장 풀스택 개발자 만큼의 대우를 해달라고 하거나(하다못해 디자이너 두 명 분의 월급이라도), 주 업무만 하겠다고 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떨어지는 업무를 잘 할 수 있는지 아닌지, 에너지가 많이 드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당장 건강하게 오래 일하기 위해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회사에서의 입지가 취약하기 십상인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냥 막무가내적 요구사항을 받아서 머리만 싸맨다.(나도 그랬다.) 지금까지 일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IT 업계에서 일하는 비주얼 전공 백그라운드의 프로덕트-UI 디자이너가 요구받는 일들과 업무 난이도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우선,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업무인 UI 디자인을 난이도 1로 가정했다. 100의 에너지를 쓰면 100만큼의 결과물이 나온다는 의미다. 통상적으로 UI 디자이너가 가지고 있는 스킬셋과 멀어질 수록 난이도가 올라가고, 이 난이도가 5 이상이면 겸업시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업무, 10이면 도저히 할 수 없어 정말로 거절했던 업무로 가정했다. 내 경험 기준이다 보니, 성향에 따라 개인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프로덕트 분야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업무로, 전문성을 가진 업무인 UI 디자인 이외에도 통상적으로 기획자나 개발자 사이에 있는 회색 영역에 있는 업무를 종종 요구받게 된다.
- UI 디자인 (난이도 1) — 주 업무로, 한국에서는 주로 스토리보드에 맞춰 UI 스타일을 정의하고 가이드를 제작해 개발자에게 넘기는 업무를 지칭한다. 많은 경우 반응형 웹과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포괄해야 하며, 이것만으로도 풀 타임 잡인 동시에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 컨텐츠 디자인 (난이도 4) — 배너, SNS 마케팅용 이미지, 쇼핑몰의 상품상세, 이벤트 페이지. 주로 광고/이벤트성 컨텐츠이며 이미지 파일로 제작된다. UI 디자인과 좀 다른 광고 디자인적 감각이 요구되기 때문에 해가 갈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 UX 디자인과 서비스 구조 설계 (난이도 5) — 기획자가 없는 회사가 많아지며 UX에 디자이너가 더 많이 관여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별도의 상세 와이어프레임 없이 레이아웃을 잡거나 UI 요소를 결정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난이도 1에 가까우나 (한국에서 화면상세기획이라고 불리는 영역) 와이어프레임을 그려 의사결정권자와 기능에 대한 논의를 직접 하거나, 스토리보드를 직접 작성해 문서를 관리하고 정책을 잡거나, 서비스 문구를 직접 쓰거나, 개발쪽에 기능을 정의해주는 업무를 포함하면 디자이너로서 겸업하기 상당히 어려운 업무가 된다. (탈모가 왔다.) 아직 유저 테스트나 리서치는 해 본 적이 없는데, 작은 규모의 서비스는 실서버에 올려 실제 유저에게 데이터를 수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 프로토타이핑 (난이도 5) — invision 류의 Low-fidelity 프로토타이핑이라면 3의 업무를 하면서 덩달아 하게 되지만 High-fidelity의 마이크로인터랙션은 또 다른 전문성과 구현 시간이 필요한 영역. 다행히(?) 개발팀도 마이크로인터랙션까지 구현할 여유는 없기 때문에 툴만 공부해 두고 써먹은 적은 없다. 타임라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하려면 별도의 전문가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 html 마크업 (난이도 7) — 코딩하는 디자이너 열풍이 불었지만 오래된 브라우저까지 크로스 브라우징해야 하는 이슈가 있고 기능이 복잡한 한국의 웹 환경은 디자이너 나부랭이가 온라인 서비스 프론트엔드 코드까지 손대기엔 만만치 않다. static 페이지 한두개 코딩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러나 서버 개발자만 있는 초기 스타트업에서 일하면 의외로 쉽게 디자이너와 개발자 업무의 회색 영역이 된다. 덕분에 크게 잘하진 못해도 스택오버플로우 검색만은 능숙한 사람 되었으나 서브잡으로 오래 지속하기는 정말 어려운 업무.
- 팀원간 커뮤니케이션과 전체 작업 스케쥴 관리 (난이도 8) — 제발 전문 pm을 고용했으면 하는 영역이다. 비전문가 출신인 대표님이나 이사님이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종종 떠내려옴. 정말 혼돈과 파괴가 온다.
- QA (난이도 3) — 개발자와의 커뮤니케이션 스트레스 때문에 의외로 많은 디자이너가 기피하는 업무이지만 실제 코드와 디자인 가이드를 정밀하게 맞추는 QA까지가 디자인 업무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종 기능 QA까지 하게 되고 (….) 사실 기능 QA도 전문가가 필요한 영역이나 프로덕트팀의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전통적 디자인 분야
디지털 프로덕트 디자인에 필요한 스킬과 경험치, 감각은 점점 전통적인 디자인과 멀어지고 있다. 이제 공유하는 스킬셋이라고는 컬러 배치나 타이포그래피 정도밖에 없을 것 같을 정도라, 시각디자인 전공을 해 봐야 경력을 쌓을 수록 학부 수준의 지식조차 가물가물하게 되나 어쩐지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이 분야의 일들까지 요구받게 되는데(…) 하지만 오히려 이 분야의 일을 하는 게 덜 스트레스 받는 디자이너도 꽤 많을 것이다.
- CI/BI 디자인 : 신규개발 (난이도 7.5) — 사실 UI 디자인이 universal을 추구해야 한다면 BI는 브랜딩 개념으로 개성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정반대적 감각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빨리 로고 하나 그려주세요"의 형태로 떨어지고 의미없는 유사로고를 생산하게 된다. UI 디자이너가 작업할 경우 모든 심볼마크가 아이콘처럼 그려지는 부작용이 있다.
- CI/BI 디자인 : 어플리케이션 (난이도 4) — 가이드만 정해져 있다면 대부분 명함, 레터, 봉투 등으로 IT회사에서 만드는 것들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의외로 크게 어렵지는 않다. 1을 한다면 자연스레 따라오고 로고가 이미 만들어져 있어도 리뉴얼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 PT용 슬라이드 디자인 (난이도 4) —은근히 자주 요구받는 업무인데 대표님 외부 발표용 회사소개서와 사내 유통용 슬라이드의 템플릿 작업으로 나뉜다.
- 브로슈어/포스터 등 인쇄물 디자인 (난이도 5) — 인쇄시 색상과 제본, 접지 이슈 등으로 인쇄물이 실패없이 제대로 나오려면 상당한 경험치가 필요하지만 학창시절 편집 디자인 수업을 했던 게 경험치의 전부인데! 할 사람이 없으니 울면서 하게 된다. 잘 모르다 보니 무작정 소개받거나 싼 업체에 했다가 종종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 굿즈 제작 (난이도 5) — 로고를 찍은 머그컵이나 티셔츠, 에코백, 스티커를 내는 게 대부분이지만 이 영역을 넘어가면 또 매번 새로운 리서치와 학습이 필요한 업무가 된다.
- 사진 찍기 (난이도 8) — 제발 그냥 스톡이미지를 사주세요. 하지만 의외로 폰카나 개인 카메라로 찍어 회사 소개 홈페이지 만들어달라는 대표님이 많다.
- 일러스트레이션 (난이도 8.5) — 한국에는 드로잉이 좋아 디자인과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 개인차가 있겠지만 UI 디자인과 드로잉은 정말 다른 영역입니다 제발 시키지 마세요.
- 사무실 인테리어 디자인 (난이도 9) — UI 디자인과 사무실 인테리어간에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사내 간판 정도는 많이 만들게 되었다. 특히 기술부설연구소 간판. 실제로는 낑낑대며 전체 견적을 내 준적도 있지만 비싸다고 까였다. 보도자료에 그럴듯한 사진을 내고 싶으면 전문가를 씁시다.
- 캐릭터 디자인 (난이도 10) — 오 마이 갓…
- 영상 디자인 (난이도 10) — 오 마이 갓…(2)
요약
- (한국의)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이미 풀스택입니다.(엄격 근엄 진지)
- 디자이너의 넓은 일을 잡무로 퉁치는 것이 아니라, 뭘 하고 있는지 가시화가 필요합니다.
- 당연히 넓은 분야의 업무를 모두 잘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일과 힘들거나 할 수 없는 일을 가늠해보고, 잘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회사에 아웃소싱을 요구합시다.